교양융합교육원 칼럼
-
2020-05-27
급변하는 사회적 요구에 발맞추어 대학의 교육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고등학생들의 대학진학률이 점점 높아지면서 대학은 보편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엘리트교육의 요람이었던 대학도 이제 앞다투어 인성교육을 포함하는 대중교육을 지향하는 교육체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그대로 대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스펙 목록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제 대학생들도 전문적인 지식과 더불어 인성과 창의성으로 대변되는 교양을 겸비해야만 사회나 기업에서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대학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한 대안으로 기숙형 대학(Residential College)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역사적으로 대중교육은 한 국가에 소속한 구성원 전체를 국가가 돈을 들여 집단적으로 교육시킨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업혁명이 고도로 발전한 것과 그에 수반된 20세기 민족국가의 성립이후로 전개된 인류의 새로운 체험을 형식화한 것을 대중교육이라 부른다. 그 근거는 대중사회 즉 민주사회에 필요한 평균적인 가치를 보편화시키는 것에 있다. 예컨대, 지금은 초등학교로 부르고 있지만 한 때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럼에도 민주사회에 필요한 평균적인 가치는 변함이 없다.그렇다면 민주사회에서 평균적 가치로 대변되는 시민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자유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한 측면만이 부각된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는 오직 성숙한 인간의 관계망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도덕이기 때문이다. 관계망의 형성은 자유에서 시작되지만, 형성된 관계망은 성숙한 인격들의 협력을 통해서 존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 자유가 소극적인 가치라고 한다면, 협력은 적극적인 가치인 것이다. 이렇게 대중교육은 민주사회를 향유할 수 있는 ‘협력하는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는 당위가 도출되는 것이다. 이는 시대적 흐름이기도 한데, 오늘날 분과학문들이 융합해야 하고 전문화된 산업들이 융합해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협력의 요구와 맞닿아 있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당위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기에 분리된 것은 눈에 보이는 영토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나누어진 것은 우리들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조화로워야 할 우리의 정신이 이미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나누고 분리시켜서 보려는 시대적 광기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가 나누어져 있고, 노소가 나누어져 있으며,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이 나누어져 있다. 이렇게 온통 나누어진 것 천지인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하지는 말자. 이것을 뒤집으면 우리는 지금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성숙해질 수 있겠는가?협력이 내면화된 것이 성숙이다. 또한, 성숙한 인간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며 나누어진 정신을 통일시키려고 하는데, 이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협력이다. 이렇게 협력은 실천적인 것이며 생활 속에서 체화되는 것으로, 대등하고 성숙한 인격들이 협조하는 방식이며, 곧 성숙한 인간의 마음이 된다. 이 마음들이 모여 우리 내면에 있는 인격의 공통분모를 형성하게 된다. 협력하는 마음과 성숙한 인격은 학습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삶 속에서 서서히 무르익으면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숙형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면, 학습공간과 생활공간을 통합함으로써 학생들에서 협력할 수 있는 기회,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라미타칼리지 RC교육센터장 안호영 >
-
2020-05-26
“나를 주인으로 창조하는 ‘글쓰기’”파라미타칼리지 글쓰기교육센터 김영철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는 무표정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그 어떤 흔적도 우리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요. 아마도 우리에겐 새로운 생활에 대한 작은 로망과 미래에 대한 큰 중압감만이 우리 자신을 감싸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의 삶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이어가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는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과거에 대하여 어떤 표정을 취하고 또한 그 표정을 보정하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삶은 ‘읽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16세기의 계몽주의 철학자 미셀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과거에 대한 성찰로부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곧 과거의 정신적 유산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독서, 즉 ‘읽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읽기’는 책과의 사귐입니다. 책은 과거의 유산을 기록한 것입니다. 성현들의 보석 같은 삶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면 언제라도 찾아오며, 원하면 항상 우리가 가는 길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도 하는 좋은 친구입니다. 이런 친구와의 교제는 ‘읽기’이며,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우리 자신은 ‘글쓰기’를 통해 주인으로 새롭게 창조됩니다. ‘읽기’는 좋은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하지만 친구가 아무리 좋아도 나 자신은 아닙니다. 친구가 우리 자신의 삶에 이정표나 동반자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우리 자신의 삶을 대신하진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고 사색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책을 읽고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내용을 반드시 쓰도록 해야 합니다. ‘읽기’에서 멈춘다면 단지 좋은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는 데에서 그치게 됩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더 이상 친구와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진지하게 만납니다. 따라서 ‘글쓰기’는 우리 자신, 즉 자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곧 더 이상 우리 삶에서 우리 자신을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새롭게 창조하는 작업인 것입니다.‘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의 혼돈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겠지요. 세상은 우리에게 그냥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러한 부담은 곧 생각을 단절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자신이 나아갈 방향도 찾지 못하고, 그저 그냥 세상에 자신을 떠맡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 자신과 표정을 찾고 또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